필리핀 중부 해역이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연안 어류 생물다양성을 보유한 지역임을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과학 다이버 켄트 카펜터 박사가 필리핀 자택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이다.
필리핀 경찰에 따르면 카펜터 박사는 지난 7월 12일 밤, 네그로스 오리엔탈주의 두마게티 인근이자 유명 다이빙 포인트인 다윈 및 아포 섬과 가까운 시불란 해안 지역 자택에서 강도 사건으로 추정되는 범행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사건 당시 침입자들은 카펜터 박사와 그의 34세 필리핀인 동반자가 TV를 시청하던 중 침입했으며, 범인 중 한 명이 카펜터 박사의 머리에 총을 쏜 것으로 밝혀졌다. 함께 있던 동반자는 범인에게 성폭행 피해를 입었으나 생존했다. 현장에서는 금품과 소지품이 도난당했다. 경찰은 확보된 증거를 바탕으로 카펜터 박사의 과학적 연구나 해양 보전 활동과는 무관하게 금품을 노린 범행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카펜터 박사는 장기 연구 과제 수행차 필리핀에 체류 중이었으며,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 위치한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에서 30년간 재직한 뒤 오는 9월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1996년 대학 생물학과에 입사한 이래 가장 뛰어난 연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의 연구 분야는 해양 생물다양성, 산호초 생태학, 어류학, 수산학, 해양 생물종의 멸종 위기 평가 등 해양 생태계 전반을 아우르고 있었다. 또한 1976년부터 두마게티 실리만 대학교 연구진과 협력하며 오랜 기간 연구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1975년 플로리다 공과대학교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카펜터 박사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원봉사자로 필리핀에 처음 발을 들였다. 이후 1985년 하와이 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평화봉사단 활동 초기부터 산호초 연구를 위해 스쿠버 다이빙을 활용했던 그는 수산 담당자들에게 다이빙 기술을 교육하고 산호초 어류 개체군을 조사할 수 있도록 강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그는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의 학술 다이빙 프로그램 다이브 컨트롤 보드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카펜터 박사는 현장 연구를 통해 필리핀 산호초 생태계를 깊이 있게 조명했다. 그는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어류학자 빅터 스프링거 박사와 함께 인도-말레이-필리핀 제도 전역에 걸친 약 3천 종에 달하는 해양 생물의 분포 기록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루손섬과 민도로섬 사이에 위치한 베르데 섬 물길을 비롯한 필리핀 중부 해역이 전 세계 연안 어류 생물다양성의 핵심 지대임을 입증했으며, 카펜터 박사는 이 지역을 해양 생물다양성의 중심 중의 중심이라는 개념으로 널리 알렸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에 합류하기 전 카펜터 박사는 쿠웨이트 과학 연구소에서 해양 과학자로 일했으며, 로마에 위치한 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 선임 수산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또한 20년 이상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에서 글로벌 해양 생물종 평가 사업을 이끌며 국제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 등재를 위해 2만 여 종에 이르는 어류와 산호 등 해양 생물군을 평가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을 총괄했다.
국제자연보전연맹 해양 경골어류 적색목록 위원회의 창립 멤버이자 오랜 공동 의장으로서 수많은 해양 생물종 전문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 공로로 종보전위원회로부터 조지 래브 보전상을 수상했다. 아울러 카펜터 박사는 필리핀과 중국 간의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재판 당시 필리핀 측 전문 위원으로 참여하여 인공섬 건설과 무분별한 어로 행위가 초래한 환경 파괴 실태를 증언하는 등 해양 생태계 수호를 위해 다방면으로 헌신해 왔다.


